 |
‘낭만주의 통일론’의 위기
“일부 소위 좌익의 무리는 혈통의 조국을 부인(否認)하고 소위 사상의 조국을 운운하며, 혈족의 동포를 무시하고 소위 사상의 동무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계급을 주장하여, 민족주의라면 마치 이미 진리권(眞理圈) 외에 떨어진 생각인 것같이 말하고 있다. 심히 어리석은 생각이다.”
백범 김구(金九) 선생의 유명한 ‘나의 소원’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백범은 평생을 오롯이 조국의 독립과 통일에 바친 대표적인 인물이다. 일생 파란만장했던 백범의 ‘나라사랑’ 역사는 언제 들어도 가슴이 뭉클하다. 해방 후 김구는 반탁 운동을 통해 남한의 공산화를 막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대해 찬반의사를 두 번씩이나 뒤집는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여 사가(史家)들의 비판여지를 남겼다.
백범, 공산주의자의 투철한 ‘결과지상주의’ 몰랐을 것
김구는 결국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고 선언한 후 1948년 4월, 북한의 초청을 받아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에 참여한다. 아마도 선각자 백범이 잘 몰랐던 것은 공산주의자들의 투철한 ‘결과지상주의’였을 것이다. 그때를 묘사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구호는 두고두고 낭만주의 통일론자들의 으뜸가는 표어가 됐다.
2007년 10월 4일 필자는 평양에 있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을 수행한 청와대 출입기자단의 일원으로서였다. 취재기자라고 해야 풀 취재 당번으로서 공식적으로 나가는 것 말고는 숙소인 고려호텔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였다. 통제된 상태에서 겪어본 평양의 이미지는 거대한 사이비종교 성지(聖地) 바로 그것이었다. 한밤중이면 어둠에 휩싸인 거대한 건물들이 을씨년스러움마저 풍겼다.
평양의 이미지는 거대한 사이비종교의 성지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맞닥트린 장면부터 그랬다. 말쑥한 양복차림의 남자들과 울긋불긋한 치마저고리 차림의 여자들이 폭포처럼 연도에 쏟아져 나와 과장된 동작으로 조화(造花)들을 흔들어대는 낯선 모습은 반가움보다 두려움을 먼저 불러일으켰다. 그 며칠 동안의 경험과 관찰은 북한이 수도 이외의 지역을 수탈하여 온존하는 ‘평양공화국’임을 충분히 느끼게 했다. 그들이 악착같이 외국인 관광객에게 평양만을 보여주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 때 평양에서 개최됐던 10.4남북정상회담에 동행했던 수행단의 꽤 많은 분들이 ‘북한’에 대한 착각과 ‘평양’에 대한 오해를 각성하게 됐다는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난다. 솔직히 말하면, 통일에 대한 무수한 낭만적인 담론들이 얼마나 어리석고 위험한지를 절실하게 깨닫게 된 계기였다. 막연했지만, 그때 그 뭔가 억지춘향 같은 야릇한 예감은 두고두고 허탈감으로 귀결되고 있다.
문재인, 또 다시 ‘대북정책 그림자’ 귀신에 휘말려
몇 해 전 거칠게 몰아쳤던 노무현 대통령의 NLL 대화록 논란은 참 씁쓸하게 다가왔었다. 그런데 최근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또 다시 참여정부의 ‘대북정책 그림자’ 귀신에 휘말려들고 있다. ‘주권국가의 기본’을 놓고 정치권에 격렬한 공방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10.4남북정상회담 이후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기권’ 표결에 앞서 우리 정부가 북한에 의견을 물어봤느냐 아니냐가 논란의 핵심이다.
참여정부 때의 외교통상부 장관이었던 송민순이 회고록을 통해 증언을 쏟아낸 뒤, 당시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표결 ‘기권’을 결정한 청와대 논의의 주체였던 문 전 대표에게 시선이 쏠리고 있다. 팩트(Fact)의 진위를 넘어선 감정적 공방이 치열하다. 대선 전초전이 시작됐다는 말이 무리 없이 들릴 정도다. 새누리당은 이정현 대표가 문재인 전 대표를 겨냥해 “북한과 내통한 것”이라고 직격탄을 쏜데 이어 연일 파상공세다.
본질 벗어난 감정대응, 당부(當否)의 판단잣대 제공
한동안 ‘그 때의 남북관계 분위기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상황론’으로 맞서던 문재인 전 대표는 힘에 부친 나머지 전략을 바꾼 듯하다. 새누리당의 공격을 음모론, 공작정치로 되치기 하는 전통적인 방어술을 구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급기야는 까마득히 흘러간 ‘북풍’ ‘총풍’까지 들먹거리며 ‘역(逆) 색깔론’으로 대거리하고 있다. 국민들이 기억창고에서 보수 새누리당(신한국당)의 추악한 과거사를 건져내도록 충동질하는 모습이다.
무릇 다툼이 벌어질 때, 누가 먼저 본질에서 벗어나 감정적으로 대응하느냐가 옳고 그름의 판단잣대가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문재인 전 대표 쪽이 적잖이 당황스러워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문 전 대표나 더민주당의 대응은 이치에 맞지 않는 대목이 많다. 문 전 대표가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 “노무현정부에 배우라”고 한다든지, 더민주당 추미애 대표가 “날아가는 방귀를 잡고 시비한다”는 식으로 반응하는 것은 가당찮은 동문서답이다.
문제의 핵심은 송민순 기억의 사실부합 진위
문제의 핵심은 송민순의 기억이 사실에 부합하는지 아닌지 여부다. 최소한, 송민순이 참여정부 때 외교를 통괄했던 통일외교안보정책실 실장이었고, 외교통상부 장관이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신빙성이 보장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적어도 정권을 감당하겠다는 세력이라면 국가주권과 연동된 이 중요한 문제를 ‘역 색깔론’으로 초점을 흐리거나 ‘날아가는 방귀’ 취급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런 태도야말로 주권자인 국민들을 허술히 여기는 증좌다.
노무현정부 당시 연설기획비서관이자 현재 문 전 대표의 최측근인 김경수 의원이 소방수로 나섰다. 하지만, 유엔 결의안 문제를 논의한 청와대 회의에서 문 전 대표가 처음에는 ‘찬성’ 입장이었다가 물러섰다는 부분이나, 우리정부의 정리된 입장을 북한에 전달했다는 대목은 여전히 불씨다. 최소한 문 전 대표의 ‘어물쩍’ 이미지를 증폭시키는 효과를 모면하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이면, ‘지명수배령’ 가부 범인에게 물은 코미디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기권’ 표결에 앞서 우리 정부가 북한에 의견을 물어봤다는 증언이 만약 사실이라면 이는 그야말로 소도 웃을 코미디다. 비유하자면, 마치 범행을 일삼고 있는 도둑놈에게 “지명수배를 할까요, 말까요?”하고를 물어본 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여당 역시 이 논란을 지나치게 길게 끌고 가거나 부풀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상대방의 쓰레기통을 걷어차고 뒤엎는 정치를 탐닉하는 일은 ‘역풍’을 불러오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남한단독정부 수립 반대를 천명한 뒤 남북협상에 참여하기 위해 북한의 초청을 받아 평양에 간 백범 김구 선생은 철저하게 농락당하고 만다. 유엔결의를 비판하면서 ‘남북한 동시 총선거’를 부르짖지만 북한의 반응은 싸늘했다. 김구는 미소 양국군의 철수의 당위성을 논했으나 북한의 뒤엔 소련이 있었다. 북한은 한반도에 공산주의 국가를 세운다는 방침을 끝내 수정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백범은 공산주의세력의 선전에 이용당한 것이다.
이제 낭만주의적 통일론은 위험천만한 접근
김정은 정권이 탄생된 이래 북한의 핵무장, 핵도발 책동이 통제 불능 상태에 다다르면서 이른바 ‘햇볕정책’으로 통칭되는 김대중·노무현정부의 낭만적인 ‘통일론’은, 마치 민족주의자 김구 선생의 질박한 ‘조건 없는 통일국가 건설’의 외침이 그랬던 것처럼 처참한 실패로 귀결됐다. 2007년 그때 평양을 함께 다녀온 참여정부 인사들은 과연 무슨 깨달음을 얻었을까. 송민순 회고록 파동을 지켜보면서 궁금증이 더욱 커지고 있는 요즘이다.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自主獨立)’을 피 끓는 소원으로 간직하며 한 평생을 독립의 제단에 바쳤던 백범 김구 선생의 삶을 다시 생각한다. 신실한 민족주의에 입각한 선생의 무구(無垢)한 통일에 대한 소망은 결코 허물이 없다. 남북을 가릴 것 없이 참 ‘애국(愛國)’의 초심을 지키지 못하고 사리사욕에 눈멀어 앙앙불락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치자(治者)들의 양식이 문제다.
통일은 지극히 현실적인 과업이다. 이제 낭만주의적 통일론은 진영논리에 찌든 저 추악한 늑대들에게 여지없이 농락당하고 말 위험천만한 접근임이 여실해졌다. 우리 모두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한반도 정세가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복잡다단해지면서 온 민족의 흉중에 끌탕을 보태고 있다.
[인물정보]
출생 1954년
직업 언론인
학력 경희대학교 문리과대학 물리학과 졸업
경력
한국기자협회 회장(제34대)
대전일보사 업무국장 겸 논설위원
KBS대전 객원해설위원(정치분야)
배재대학교 미디어정보사회학과 겸임교수
한국지역언론인클럽(KLJC) 감사
경북매일 논설위원
CAM뉴스 cambroadcast@naver.com
<저작권자 © CAM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대덕문화원, 제29회 대덕백일장 개최
